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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현재를 사는 유일한 방법

by liogaddu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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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하고 너무나 예측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는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급기야 체념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에 알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체념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인생을 통제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
변덕스러운 인생, 언제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며 피해망상에 젖어있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무엇을 접하든 전적으로 수용하고 매 순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삶을 받아들인다는 건 패배감에 젖어 주저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전부인 삶의 이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아차림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 영항을 미치게 된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변화무쌍한 한경에서도 우리의 정신 건강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으며 균형 잡힌 삶을 산다는 의미다. 우리의 중심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늘 명심하며 외줄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이란 이렇듯 통제와 수용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뜻이다.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측할 수 없고, 때로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 삶의 이치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희생자로 살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어떤 일들이 '왜'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 이유를 알면 조금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쓸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 카르마의 영향이라거나 우연일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유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어떤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와 더 관련이 깊은 면들이 있다. 예컨대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걸까? 내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혼란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것일까?
  이렇게 자문하다 보면 어떤 '나쁜' 사건도 성장을 도모하는 유익한 경험으로 바뀌어, 우리가 그전에 아주 나쁘게만 보던 일에서도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보물을 얻게 된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비난하던 수동적 입장에서 현실을 만들어가는 주도적인 입장으로 바뀔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삶이 우리를 부당하게 괴롭힌다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힘이 생긴다.
 어떤 질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역경을 이겨낸 생존자가 될 수도 있다.
에를 들어 희생자는 이렇게 푸념한다. "삶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줄까?"
반면에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시련을 통해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자체가 나를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응하는지, 방어적이고 부정적으로 대응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깨어 있는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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