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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생각

파티가 열렸다. 아모르 파티!

by liogaddu 202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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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 본성상 고통과 고생을 수반한다. 그 궁극적 형태가 바로 죽음이다. 이런 현실을 맞아 인간은 선택을 내일 수 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약을 먹거나 어딘가에 중독되어 고통의 영향력을 덮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내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 지나치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야망을 줄인다면 실패나 조롱에 노출될 일이 없다.
일찌감치 관계를 끝내버리면 격하고 고통스러운 이별을 피할 수 있다.

 이런 접근법의 뿌리에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음은 고통과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자세를 설정하고, 회피는 우리의 패턴으로 자리 잡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인생이 나한테 가하는 고통과 남들이 나를 위해 해주지 않는 일들을 불평하고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가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다. 죽음의 부정적인 역설적 효과가 우리를 장악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아모르 파티'라고 말한 것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다.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한 나의 처방전은 아모르파티다. 있는 그대로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필연적인 일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인생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병에 걸리고 몸이 아플 것이다. 사람들과 이별할 것이다. 나 자신의 실수로, 동료 인간들의 추잡한 짓으로 실패를 맛볼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런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포용하는 것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교훈을 얻고 우리를 단련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삶 자체를 긍정하고 삶의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 있다.

 이를 실천하려면 사건들을 끊임없이 운명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병에 걸리면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그 부산함으로부터 벗어나, 속도를 늦추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재평가하고, 훨씬 더 자주 누리는 건강한 기간에 감사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즉시 무언가를 찾을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신체적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사람들이 내 뜻에 반하거나 나를 배신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평가하고 어떻게 하면 이번 기회를 이용해 인간 본성을 더 알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약삭빠른 사람들, 불쾌한 사람들을 감당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위험을 감수했다가 실패했다면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환영해야 한다. 사랑에 실패하면 둘 사이에 뭐가 잘못 됐었는지, 내가 뭐가 부족했었는지, 다음에 누구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누에고치처럼 숨어 들어서 그런 경험 자체를 회피함으로써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우리는 이를 경험함으로써 육체적, 정싱적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이 철학이 부정적인 것을 즉각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줄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이 과정이고, 타격이 있으면 받아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마음이 그것을 학습의 경험으로 전환할 것임을 알고 있다. 연습을 한다면 그런 전환은 더 쉽고 빨라진다.

바로 이 운명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바꿔놓고 우리가 짊어진 짐을 가볍게 하는 힘이 있다. 모든 사건이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고 결국에는 깨달음을 줄 것임을 안다면 이런저런 불평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훨씬 더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혹독한 인생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데,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 본성의 법칙-

 

 

오랜 시간 고통을 회피하며 살았다.

그냥 피하고만 싶었다.

어떻게 해야 벗어날까 그 궁리만 하며 긴 시간을 보냈었다.

장소의 문제인가 싶어 해외까지 나간 살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받아들였느냐.. 그건 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에 충실하기 위해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역설.

육아로 온몸이 지치고 괴롭고 힘들때

만약 어제 기사에 난 태권도에서 관장의 학대로 심정지 된 상태로 병원에 실려갔다는 아이가 내 아이라면

지금의 이 힘듦이 문제가 될까?

아 내 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다~가 아니라

내일 아이가 눈앞에 없을 수도

혹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골머리 썩는 상황을 없애고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 긴 시간을 보낸 날들을 무척이나 후회한다.

그 후회를 만회하려면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에 충실하려면 내 모든 에너지를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내 생각의 맷집을 키운다.

 

삶의 고통이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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