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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계몽을 통해 극단적 형태의 비이성이 극복됐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비이성의 정도는 끊임없이 증가했다 감소했다를 반복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철학자가 넘쳐나고 과학 정신이 싹텄던 페리클레스 시대의 황금기가 끝나자 미신과 사이비 종교, 편협함이 득세하는 시대가 뒤따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순환주기가 계속 반복되도록 되어 있는 게 인간 본성의 일부다.
인간의 비이성은 그저 얼굴과 옷을 바꿔 입을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마녀사냥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불과 얼마 전인 20세기만 해도 우리는 스탈린의 공개 재판과 매카시의 미국 상원 청문회, 중국 문화 대혁명 기간의 수많은 박해 사건을 목격했다. 온갖 사이비 종교는 끊임없이 새로 등장하고 개인을 숭배하거나 유명인에 집착하는 일도 계속된다. 기술은 오히려 종교적 열정에 불을 붙인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믿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기에 어디서건 그 대상을 찾아낼 것이다. 설문조사를 보면 21세기에 귀신이나 유령, 천사를 믿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났다.
-인간 본성의 법칙-
막막하다.
불안하다.
불안함이 두려움을 만든다.
두려워서 조금 먼 미래를 알고 싶다.
미래를 알면 막막함이 해소될 것 같다.
그래서 우린 무당을 찾아가거나 타로를 본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두려움에 압도되면 시야가 급격하게 좁아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더 두려워진다.
악순환이다.
두려울 때 벌벌 떨어도 된다.
마음껏 울어도 된다.
단.
눈을 떠야 한다.
두려움을 눈을 뜨고 바라봐야 한다.
벌벌 떨고 울부짖으면서도 지긋이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한가지 의심을 해보자.
내가 두렵다고 느끼는 이것이 진짜일까?
100으로 느껴지던 두려움에
1의 의심을 넣어보자.
매일매일 의심의 크기를 키워보자.
2의 의심. 98의 두려움.
3의 의심. 97의 두려움.
.
.
.
..
49의 의심. 51의 두려움.
50의 의심. 50의 두려움.
여기까지만 오면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게 된다.
두려움에 확신을 더해준 것은 내 편협한 생각이었다.
나는 그대로면서 원하는 먼 미래를 본다면
그건 허상이다.
오늘 기분좋게 하기 위해 5만 원, 10만 원을 버린 거다.
아주 작은 행동으로 변화를 주면서 오늘을 충실하게 쌓아가자.
이게 제대로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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