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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통을 다룬다.

by liogaddu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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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문제를 빨리 대신 해결하려는 부모의 조급함에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아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면, 부모는 견디기 힘들다.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 부모는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무력감 탓에 어떻게든 아이를 구제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장에게 전화를 걸고 담임교사에게 큰소리를 치며, 감히 내 아이에게 상처를 준 아이의 부모에게 항의를 한다. 부모의 이런 반응이 아이의 고통을 더 키운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부모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면, 아이는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견디기 힘들어한다.

 

 아이가 스스로 고통을 견디도록 부모가 지켜봐주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음 사례에 잘 드러나 있다.

 

 약간 과체중에 두꺼운 안경을 쓴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학급 친구들에게 종종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자 외모에 극도로 신경을 쓰면서 엄마에게 유행하는 옷과 가방, 신발을 사달라고 졸랐다. 모두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젊고 세련된 엄마는 딸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줬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방에 들어가 한참을 울곤 했다. 어느 날은 밥을 먹거나 숙제하는 것도 거부했다. 엄마는 딸의 이런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녀도 딸의 외모가 창피했다. 그래서 딸을 위해 운동기구를 사고, 영양사까지 고용해 운동과 체중 감량에 공을 들였다. 주기적으로 미용실에 데려가 헤어스타일을 바꿔주는가 하면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사용하게 했다. 또 학교에 전화해 교사들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다시는 딸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모녀가 함께 심리 치료사를 만나 상담을 받고, 엄마부터 불안감을 가라앉힐 약을 처방 받아 먹기 시작했다.

 

  딸의 고통을 지켜보는 게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엄마는 딸이 스스로 고통을 다스리도록 도와주기는 커녕 자기감정을 느낄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상처받고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신 외모만 바꾸면 친구들이 받아줄 거라고 믿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로운 감정은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 고통스러우니 숨겨야 한다고 배우고 있었다. 그게 안 될 때는 남 탓으로 돌리거나 외모를 바꾸는 등의 다양한 조치로 위장하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고통을 지켜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무조건 억누르거나 감추려고만 한 탓에, 아이는 자기가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거부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누군가 자기 문제를 빠르게 처리할 방법을 알려주길 간절히 원했다.

 

 

감정은 '적'이 아니다. 직시해서 바라보면 날 위해 이용할 '힘'이 된다.

 아이가 감정을 잘 다스리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이가 자기감정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발끈하는 것과 다르다. 여기서 자신을 내준다는 건 우리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든 우선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가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북돋워주는 것이다. 아이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고통이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느끼는대로 부모가 가만히 지켜봐주면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감정에서 벗어난다. 고통도 그저 하나의 감정일 뿐임을 이해하고 고통에서 쉽게 빠져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고통을 겪는 것보다 고통을 예상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아이들이 고통을 그 순수한 형태 그대로 경험할 뿐, 저항함으로써 고통의 강도를 키우거나 반감으로 물들이지 않는다면 고통은 지혜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뀐다.

 

 아이들은 그렇게 감정을 처리하고 나면, 어른들처럼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같이 고통도 파도처럼 왔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반면에 우리 어른들은 고통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느끼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흔적에서 기인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감정과 뒤얽히기 때문이다. 고통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만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 중 하나는 혼자서 고통을 다스리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느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는 데 더 익숙하다. 예를 들면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비난과 분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감정이 펼치는 드라마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아니면 음식이나 술, 운동, 마약 또는 다른 약물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우리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고통을 외부에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잘못된 방법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해결책은 따로 있다. 혼자 고요히 앉아 자신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고통이 에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아이가 고통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인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 고통을 너무 겁내는 대신 "지금 나는 고통스러워"라고 가볍게 인정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심판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그저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이런 태도는 아이가 어릴 때 부모가 곁에서 가만히 지켜봐줌으로써 몸소 가르칠 수 있다. 대화가 필요하다면 아이들이 먼저 말를 꺼낼 것이다. 부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구나"와 같은 말로 공감해주기만 하면 된다. 논리나 요란한 응원도 필요 없고, 빨리 해치울 필요도 없다. 그저 집안에 그럴 여지를 두기만 하면 된다.

 

 혹시라도 고통이 한동안 계속된다면 극단적인 면은 다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경험해보자. 그러면 고통을 빛깔과 다양한 취향,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어떤 것'을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이가 고통도 불사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면 안된다. 그보다는 아이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를 바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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